갑자기 생긴 출장때문에 일이 여러가지로 꼬였다.
사실 번역일이 급해진 것도 갑자기 비집고 들어온 출장 일정 때문에 마감일자가 삼일이나 급해졌기 때문이고,
참석해야 하는 포럼도 전혀 준비같은 거 하지 않아서 마음이 이리저리 심란했다.
그래도 딱 하나 좋은 건...
바로 면세점 쇼핑이 가능하다는 점!
마침 애용하던 화장품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탐나던 가방도 장만하려던 차에,
시기가 딱 맞아떨어졌다며,
그저 백해무익할 줄 알았던 출장도 단 하나의 장점은 있구나하며 위안을 삼았다.
일요일을 맘껏 쓰겠다며 어저께는 무리해서 늦게까지 일을 했고, 얼추 스케줄표에 준하는 작업량을 끝내는 수고도 불사했다.
오늘은 느지막히 일어나 집에서 게으름을 피우다가 소공동 롯데백화점으로 고고~!!!
참참,,,굽 부러진 구두도 수선 맡기기 위해 한 손에 챙겨들고~!!!
일요일 오후 명동에는 사람이 무지막지하게 많았다.
그래서 명동은 내가 서울에서 강남역 다음으로 미워하는 장소이다. 허나 사람에 치여도 오늘만큼은 생짜증이 나지 않았다.
백화점 안도 별반 다를 거 없이 대혼잡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어느덧 9층에 다달랐고 가장 심장박동수가 빨라질 시점인 면세점 입구를 눈 앞에 둔 그 순간!!!
난 너무나 냉정해졌다.
면세점 쇼핑을 위해 필요한 건 뭐죠?
여권하고 항공편 스케줄!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응?? 왜??...............
하악하악.
내 여권 ...사무실 서랍에 있는데...집에 있으면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다시 가져나 올 수 있지...
이건 뭐 고민도 안하고 깨끗이 포기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지체도 없이 순식간에 반대방향으로 돌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마트는 살 거 없어도 잘 돌아다니는데, 백화점에선 살 거 없을 때 절대 돌아다니질 못하겠다..
진심으로 탐나는 게 많아서 배알이 꼬여버리나보다..난 여기서만큼은 못먹는 감 찌르지 않는다.
포기할 건 깨끗이 포기하고, 구두라도 맡기고 들어가자.
내려왔다. 매장을 수배한다.
이상하다...있어야 할 매장이 나타나지 않는다.
묻는다..응..매장 철수했단다..
그 순간 생각만큼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았다. 그때 난 누가봐도 화난 표정이라기 보단 멍한 표정을 짓고 서있었을 것이다.
머릿속을 깨끗이 지우고 백화점을 나왔다.
하지만 그 때부터 봉써니 언니 말같은 '지대로 짜증'이 몰려왔다.
사람 치이는 것도 짜증났고, 바람부는 것도 기분 나빴고, 손에 덜렁덜렁 들려있는 구두담긴 봉투도 성가셔 미칠 지경이었다.
머리나 확 잘라버리겠다고 작정을 하고 미용실로 돌진했다.
일요일 오후 명동의 미용실에는 역시 사람이 많았다.
대기시간을 물어보니 다행히 그리 길지 않았다.
잠깐 앉아서 생각보다 향이 괜찮았던 미용실 커피를 마시며 기다렸더니,
마음이 좀 가라앉아 7년만에 처음으로 어깨 아래로 기른 머리를 자르는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앉았다 다시 나오기도 뭐해 파마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머리를 이렇게 길러본 것도 7년만이지만, 긴 머리에 파마를 해보는 건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처음있는 일이다.
그래서 파마후 내 모습이 전혀 상상이 되질 않아 기대반 걱정반이었다.
또 거긴 내가 다니던 미용실이 아니라, 약간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규모도 컸고, 미용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다들 괜찮아 보여 상식을 믿고 미용사에게 대강 어떤 스타일을 원하는지 설명했다.
이래저래 한두시간이 흐르고, 두구두구두구두구~~~
롤을 풀기 시작했다.
난 아주 굵은 롤을 원했다. 한듯만듯 심심한 머리..
헉....근데.....
롤을 풀고난 내모습은
완전 캐발랄 그 자체였다...
눈시울이 따금해지는 거 같았지만 눈물이 나진 않았다.
그래..내 얼굴이 잘못이고 원흉이지 머리카락이 무슨 문제랴..
삽식간에 계산을 하고 도망치듯 미용실을 빠져나와 부리나케 집으로 왔다.
머리털을 쥐어잡고 쭉쭉 땡겨가며 애를 썼더니,
다행히도 나의 정신도 머리카락도 안정을 찾아갔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정도 이상의 밝은 표정은 나오지 않는다..
역시 친구들 말대로 난 머리를 당장 잘라버려야하는걸까..
불과 1년 전 짧은 머리에 파마를 한 난 저리도 밝게 웃을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4년전 오빠가 갑자기 파마를 하고 들어온 날 악담을 퍼부은 죄값을 이제와서 치루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얼떨결에 머리에 파마를 하고 열일곱 소녀처럼 수줍은 표정을 하고 귀가하는 오빠에게
어깨를 토닥이며 머리는 자라고 자르면 되는거라는 따뜻한 위로 한마디는 못해줄망정..
배추머리 심병조라며 '지구를 떠나라~지구를 떠나라~'하고 사흘밤낮을 놀려댔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다.
오늘 이래 시련을 다발채로 맞이했으니, 다음번엔 분명 좋은 일이 생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