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도 과학이다.

space | 2007/11/19 12:00 | conpanna
아빠, 엄마, 오빠 그리고 나.
우리집 식구 모두에겐 가슴속 저 깊숙한 곳에서 부터 우러나오는 독일제 제품에 대한 경외심이 있다.

아빠와 오빠의 공통분모-Mercedes Benz
엄마의 영원한 로망 - Fissler 냄비세트와 HENCKEL 일명 쌍둥이칼
그리고 나...그들에 비해 많이 찌질하지만 Steadtler 필기구상당 아낀다.

내가 정확히 스태들러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한 건 2004년 어느 우울한 봄날이었다.
당시나는적을 둔 곳이라곤 이얼싼 어학원이 전부인 대학원입시생이자 막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지 않는(못한)다는 이유로 사회적 지탄과 동정을 동시에 받는 백수였다.
학원생들의 뜨거운 향학열은 그저 빈둥대며 살아가던 내게 세찬 동기부여는커녕 더욱 큰 삶의 공허함만을 떠넘겨주었고, 나는 그 공허함의 무게조차 이겨내지 못해학원으로 가던 도중 종종 딴길로샜고 수시로광화문 교보문고를 들쑤시곤 했다. 도서, 음반, 학용품코너 어느곳하나 편애하지 않고차근차근 그 장소를 맴돌았다.

대학교 때까지 나는여느여학생들이 그러하듯다양한 색깔펜을 구비하여 즐긋기 상비체제를 구축하는 부류 중 하나였다.
당시엔 주로 펜 한자루 위아래 양쪽으로 굵고 얇은 싸인펜을 각각 달고 있는 Tombow의 playcolor 2 시리즈를 미친듯이 사댔었다.
허나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필기구를 쓸일이라곤 노트테이킹(일명 속기..)할 때가 대부분인지라,
정작 필요한 건 형형색색 아름다운 색깔펜이 아니라 손에 쥐었을 때 안정적인 그립감을 안겨주고, 볼펜심 볼의 회전력이 우수해 자유자재로 좌우상하 율동이 가능한 놈이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나름 기념비적인 날이지만 정확한 날짜까지 기억하는 건 무리) 교보문고 학용품 코너를 어슬렁거리다가 나는 보고야 말았다.
세상의 모든 시련을 짊어진 것마냥 불안과동요에 시달리던 암울한 백수 학원생 본인에게더없이 큰 안정감을 주었던세모반듯한균형잡힌 자태를 지닌 채, 네모반듯 종렬횡대한triplus 볼펜 네자루.

나의문구사용연대를 둘로 나누고자 한다면 그건 바로 스태들러에 빠져들기 전과 후이다.
저 심플한 디자인에견줄만한 탁월한 드로잉력을 구비한 제품이다. 난 triplus 볼펜을 시작으로 스태들러사용범위를 서서히 확장해 나갔다.가끔은 오빠 필통에서나에겐 별 필요도 없는 제도용 연필과 샤프를 훔쳐내기도 했다.
우수한 볼펜을 널리 알리고자 학원에도 열심히 나갔다. -_-; 모두를 설득할 순 없었지만제법여러명의 수험생들을 설득시켜 스태들러사에서 리필 볼펜심하나조차 받지 못한채, 나는 나름 가열차게 그들의 판로를 개척해주었다.

오랜만에 볼펜을 쥐고서면작업을 할 일이 생겨서 한 자루 손에쥔김에그와 얽힌 추억이 잠깐 생각이 났나보다.
넌 여전히 아름답구나.